회색인의 독서일기 6
글/권혁범 회원
회색인의 독서일기라는 글을 주제로 연재해 주실 권혁범 회원님은 대전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2009년 2월 부터 홈페이지에 회색인의 독서일기라는 주제로 글을 연재하고 계신데요, 초록이메일을 통해서도 회원님께도 발송할 예정입니다. 소식지에도 실릴 예정이니 기대해 주세요!
★지나간 호는 회원님의 홈페이지 두 번째 면 http://dragon.dju.ac.kr/~kwonhb/bookweek.htm 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26. 「동화」 크리스 반 일스버그 Chris Van Allsburg 글/그림, 김서정 옮김, <해리스 버딕의 미스터리 The Mysteries of Harris Burdick>
버딕이란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출판사에 찾아와서 남기고 간 그림을 저자가 다시 그렸다는 설명이 책 맨 앞에 나와 있다. 이 머리말도 사실인지 아닌지 애매하지만 열네 점의 흑백 그림들은 아주 기이하고 서로 어떤 유기적 관계를 맺지 않고 있다. 그야말로 미스터리다. 게다가 그림에 따라오는 글 역시 무엇을 얘기하는지 알 길이 없다. 어른들이 읽어주며 자신의 상상력을 극대화시켜도 되고 아예 아이들에게 그림을 보고 이야기를 만들어보라고 해도 좋다. 볼수록 신기하고 기억에 오래 남는 그림 열네 점이다.
27. 「영화」 <더 레슬러 The Wrestler>(2008)
프로 레슬링이 사실은 잘 짜인 각본에 의해 이뤄지는 ‘쇼’라는 것을 알아채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박치기 왕 김일에 대해 후배 레슬러 한명이 각본 없는 도전장을 내밀자 그는 실제 시합에서 도망가기에 바빴다. 진짜 레슬링을 하면 둘 중의 한명의 뼈가 부러질 것은 명백했으니까 (내 기억이 맞나?). 이 작품의 주인공은 홀로 살고 있는 남자 프로 레슬링 선수. 그는 이미 은퇴할 나이가 되었고 그래서 취직도 해보지만 레슬러에게는 전혀 맞지 않는 일을 오래 할 리가 없다. 또한 훌쩍 커버려 성인이 된 하나 밖에 없는 딸아이는 아버지라면 신물을 낸다. 딸과 화해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일은 빗나간다 (감정이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트립쇼 걸 한명을 좋아하게 되었지만 그는 이 관계에 대해서도 역시 서투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레슬링이 아니라 ‘관계’에 대한 영상적 보고서라 할까? 최근에! 본 여러 영화중에서 하필 이 작품이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28.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교양인, 2005)
저자는 아시다시피 <한겨레> 신문 칼럼 등을 통하여 널리 알려진 여성주의자다. 나는 이 일상의 정치학에 대한 비판에서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문제에 대해 깨우침을 얻었다. 이 책은 ‘어머니’ 담론에서 가정폭력, 늙음, 성매매에 등에 관한 날카로운 통찰로 가득 차 있다. 가령 ‘“‘위안부 누드’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은 민족의 명예를 모욕하는 일이고, 여성 연예인의 성적 사생활을 몰래 찍고 돌려보는 것은 즐거운 일인가? 이런 의미에서 나는 ‘위안부 누드’ 제작 행위뿐만 아니라, 이 문제에 대한 한국사회의 해석, 한국인(남성)들의 분노는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두렵기 까지 하다”라는 발언이 한 예다. “모성은 본능이 아니라 정치학”이라는 단언도 마찬가지다. 여성학개론 수준의 이해나 여/남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하는 사람에게 강추! 아마도 그의 지적인 힘은 ‘여성의 전화’에! 서 5년간 상근자로 일한 경험에서 나오는 듯하다. 여성학개론을 들은 대학생 수준이면 이해할 수 있는 책이다.
29. 여지연, <기지촌의 그늘을 넘어 Beyond The Shadow of Camptown-Korean Military Brides In America>, 임옥희 옮김 (삼인, 2007)
한국전쟁이후 지금까지 거의 십 만 명에 육박하는 한국인 여성들이 주한 미군과 결혼해 미국으로 이민 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개인적인 얘기를 하자면 나는 유학시절, shoplifting을 하다 체포된 한인여성을 위해 통역을 한일이 있다. 그는 주한미군(흑인)과 결혼했다가 이혼해서 아이 둘을 키우고 있는 분이었다. 서투른 영어로 법정에서 통역하며 내 마음은 무겁고 착잡했다. 그가 미국사회의 맨 밑바닥에서 신음하는 존재였기 때문일까? 결국 얼마 안 되지만 통역비를 그에게 주고 말았다.
이 책은 기지촌 여성 중에서 미군과 결혼하여 미국에 ‘정착한’ 여성들에 대한 연구다. 저자는 이들과의 심층 인터뷰를 통하여 국적, 젠더, 인종, 계급간의 복잡한 관계를 분석하고 드러낸다. 이들은 어디에서도 ‘이방인’이며 비가시화되는 존재다. 이들은 한인교회 안에서도 소외된다. 이들은 다른 민족 남성에 의해 ‘오염된 여성’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들에 대해 값싼 동정을 베풀거나 쉬운 연민의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연구자들이 흔히 갖기 쉬운 ‘대상화’의 덫에서 벗어나 있다. 다만 이들 삶에 대한 전폭적인 긍정을 바탕으로 차분한 분석을 가할 뿐이다.
30. 신기욱. 마이클 로빈슨 엮음, 도면회 옮김, <한국의 식민지 근대성 Colonial Modernity In Korea> (삼인, 2006).
부제가 말해주듯 이 연구는 민족주의 관점을 견지하는 ‘내재적 발전론’이나 정치적으로 위험할 수 있는 ‘식민지근대화론’ 양자를 넘어서는 데 목적이 있다. 이 책은 친일과 반일, 민족과 반민족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회색지대’에 대한 탐구를 시도한다. 당연히 탈민족주의적이다.
현대의 한국인들은 일제 점령기 시대 35년 동안 조선인들이, 친일파를 제외하면, 모두가 민족 독립을 염원하고 그것을 일차적인 목표로 삼았고 반외세 반식민지적 투쟁을 하거나 지지했다는 가정을 하고 있다. 하지만 식민지 조선에서 농민, 노동자, 여성들은 민족정체성보다는 자신 집단의 정체성을 더 강하게 가진 경우도 많았으며 특히 ‘백정’들은 민족차별보다 같은 민족인 조선인들에 의해 더욱 혹독한 신분차별을 당했다. 이런 점에서 필자의 한명인 김중섭의 ‘백정’에 관한 연구는 희귀하며 그만큼 소중하다.
또한 다수는 일제 35년간 아무런 근대적 발전이 없었다고 주장하거나 반대로 일제하에서 이뤄진 성장을 객관적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식민지 시대에 공업이 성장했고 여러 근대적 제도가 들어온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것에 인색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일본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의 내용, 배경이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번역자 도면회 (내가 있는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다)는 4년에 걸쳐 이 책을 공들여 번역했다. 그만큼 번역이 매끄럽고 읽기 편하다. 대학의 역사학과 고학년이나 대학원생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내용이다. 책 가격도 2만 8천원이니 부담이 될 수도 있다.
독서일기 6을 보냅니다. 지나간 호는 http://dragon.dju.ac.kr/~kwonhb/bookweek.htm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