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숨 작가의 장편소설 "철"

2009년 4월 7일 | 회원소식나눔터

                                                                   [회원  책 추천] 김숨 작가의 장편소설 “철”
대청호보전운동본부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이건희 회원님께서 회원님들이 읽을만한 책 추천을 해 주셨습니다. 평도 보시고 함께 읽어보는 건 어떨까요? 신입회원이 읽을만한 책 추천에 책 선정과 함께 감상평까지 보내주신 이건희 회원님게 감사드립니다.
                                                                                                                                                                     글 /이건희 회원


사실 이책을 만나기전에 김숨이라는 작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계룡문고에 아이의 동화책을 사러 갔다가 유난히 눈길을 끌었던 책표지와 특이한 작가의 이름과 더 특이한 소설의 제목에 표지만 보고 책을 구입하는 모험을 하였다.
“조선소 노동자들에게는 믿고 의지할 것이 오로지 조선소에서 주어지는 노동밖에는 없었다. 그들은 온종일 힘써 노동하면서도 노동에 갈급했다. 노동은 그들에게 일종의 구원이자 축복이었으며 일종의 선이었다.”
소설에서 나오는 조선소는 폐쇄된 공간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폐쇄된 조선소에 갇혀 있는 생각을 들게 할 정도로 책에 빠지게 하는 작가의 필치는 놀라울 정도다. 아마 책을 읽은 분들은 책을 읽는다기 보다는 한편의 영화에 빠져있는 착각을 느낄 정도로 생생한 경험을 했으리라. 작가는 노동과 계급의 문제를 딱딱한 문건이 아닌 현란한 화면(?)으로 보여준다. 거기에 자본주의의 모순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을 수시로 등장시킨다.
마을을 붉게 물들이는 녹가루와 그것을 만병통치약인듯 들이마시는 사람들, 조선소가 들어선 이후 마을 상공을 까맣게 뒤덮은 불길한 비둘기떼(이것 또한 인간이 만든 창조물이라니..), 생니를 뽑고 쇠 틀니를 해넣고, 막판에 가서는 조선소의 철이 부족해 쇠틀니를 징발해간다.
엽기적으로 보이지만 현실보다는 덜 엽기적인 장면이다.
조선소의 주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조선소에서 만들어지는 철선의 실체에 대해 소문만 무성하다. 떠돌이 이발사 꼽추가 조선소의 주인이라고 부르짖는 장면은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이다. 누구나 주인이라고 할 수 있고, 누구나 자기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현실의 자본주의이다.
하지만, 주인은 꼽추도 조선소 노동자도 아니었다.
자갈밭과 황무지였던 곳에 조선소가 세워지고, 지붕에 슬레이트가 올라가고, 백설탕과 가자미를 마음껏 즐길 수 있게 된 그곳… 그곳은 조선소의 몰락과 함께 더욱더 황폐화된다.
자본의 몰락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아니면 자본주의에 심취한 인간의 몰락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철은 녹슬기 마련이다.’
아마 이 소설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라면 이렇게 답하겠다.
책의 제목이 녹슬지 않는 스테인레스였다면 어땠을까?
녹슬지 않는 영원한 제국
세월의 흐름에 대체되지 않는 완전한 제품
철이 녹슬었는지 인간의 노동이 녹슬었는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소설은 철선의 실체를 보여주지 않으며 마감한다. 하긴, 조선소의 주인이 누군지도 정확히 보여주지 않으니, 작가는 수많은 상상을 하게 하는 ‘얄미운 나비’이다.
“철’로 상징된 산업사회 이면의 어두운 기억 한 페이지를 차근차근 적어 내려간 한 편의 소설이 2008년 끝자락에 독자들을 찾아왔다. 이 세상에 없을 것 같은 가상의 마을, 그러나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모습이 오롯이 담겨 있는 소설이다. 때로는 잔혹한 우화로, 때로는 적나라한 리얼리즘 소설로 다가오는 이 작품은, 불편하지만 눈을 뗄 수 없고 아프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지난날의 자화상이다. 이것은 이미 지나가버린 한 시대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때를 기억하는 이들과 여전히 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기에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이다.”
따옴표에 나오는 글은 책을 소개하는 글로써 웬만한 포털에는 다 나와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의문이 있다.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불분명하다.
물질문명으로 대변되는 아버지세대에 대한 기억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무언가 석연치가 않다. 물론, 소설은 작가의 경험에서 나오게 되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작가가 시대를 특정하지 않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