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인의 독서일기 4
글/권혁범 회원
회색인의 독서일기라는 글을 주제로 연재해 주실 권혁범 회원님은 대전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2009년 2월 부터 홈페이지에 회색인의 독서일기라는 주제로 글을 연재하고 계신데요, 초록이메일을 통해서도 회원님께도 발송할 예정입니다. 소식지에도 실릴 예정이니 기대해 주세요!
★지나간 호는 회원님의 홈페이지 두 번째 면 http://dragon.dju.ac.kr/~kwonhb/bookweek.htm 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17. 나카자와 케이지, 김송이/이종욱 옮김, <맨발의 겐 1-10> (아름 드리미디어, 2000-2002). (만화)
저자는 히바큐샤다. 어릴 적 겪은 원폭투하라는 사건과 그로 인한 트라우마를 매우 사실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일본이 원폭 피해를 입은 엄청난 사건을 ‘고소해’ 하는 경향이 있다. 가해자 일본에게 가해진 최고의 복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대부분 전쟁과 관련 없는 민간인, 여성, 노인, 청소년, 아이들이었다. 더구나 희생자 중에는 몇 만 명의 조선인 히바큐샤도 있었다. 더구나 그 때문에 한반도는 분단되지 않았는가. 일본이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미국의 원폭 투하를 정당화할 수 없다. 그것은 또 하나의 홀로코스트며 제노사이드다. 이 만화를 보면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며 인도주의 정신에 반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만화에? ?‘비국민’으로 고립되는 저자의 가족에게 여러 가지 도움을 주는 또 한명의 ‘비국민’ 조선인 박 씨가 등장한다. 당연히 일본 민족주의의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다.
18.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감독: 키에로브스키)
비디오 가게에 빌리러 갔더니 점원이 처음에는 그런 영화가 없다고 했다. 포기하고 나오려 하는 참에 ‘에로’칸에 꽂혀 있는 이 영화가 눈에 들어왔다. 당연히 에로 영화는 아니다. 이 작품은 ‘내 인생의 영화’ ‘Top 10’(best 10은 콩글리시다) 에 들어간다. 보면 볼수록 알 수 없는 작품이고 지금도 이 영화의 의미를 찾는 중이다. 나는 이 작품이 인생의 의미에 관한 것이라고 일단 생각하는데 한편으로는 삶의 우연성 및 애매모호함, 세상과 인간의 신비성을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인간에게 이중적 자아가 존재함을 보여주려는 것일까? 내용은 미리 얘기하면 재미가 없을까봐 여기서 멈춘다. 이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O. S. T는 강추. 나 역시 한 백번은 들은 듯하다. 키에로브스키의 다른 작품 ‘삼색연작’이나 ‘십계’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 ?다루고 싶다. 영어판 제목은 The Double Life of Beronica.
19.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Man's Searching for Meaning> (청아, 2005).
머리맡에 두고 틈틈이 보는 책. 나치시대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한 유대인 의사의 기록이다. 대학시절 이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몇 년 전 이 책을 다시 읽고 깨달음을 얻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우리 자신이 인생에 대해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를 묻지 말고 인생이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깨달아야 한다는 주장이 내 마음에 다가왔다. 책의 영어판 제목, ‘인간의 삶의 의미 찾기’가 그것을 이미 암시한다.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그들이 학살대상이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내가 겪은 군대 훈련소와 어쩌면 이리 흡사한지. 엄동설한에 연병장에서 옷을 다 벗게 하고 샤워장으로 밀어 넣는 일 그리고 불과 몇 분 만에 ‘동작 그만!’하며 다시 바깥으로 내모는 과정은 아우슈비츠나 논산훈련소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비누칠은 한 채 밖으로! 쫓겨났다).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면 작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고등학생에서부터 중장년까지 다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20. 미셀린 이샤이 (Micheline Ishay), 조효제 옮김, <세계인권사상사 The History of Human Rights> (길, 2005).
순전히 옮긴이 조효제를 믿고 산 책이다. 본문만 육백페이지에 달하며 가격도 무려 4만원이다. 고대에서 지구화시대에 이르기까지 등장했던 인권이론과 사례를 쉬운 문체로 잘 정리했다. 사상사라고 번역한 이유는 잘 모르겠다. ‘인권의 역사’라고 하면 간단하지 않을까? 그리스 및 로마, 불교 및 유교에서 계몽주의 시대, 그리고 세계대전시기와 현대의 각종 인권론을 검토하며 미래의 인권 이론이 어디로 가야할지를 제시한다. 이 책이 특이한 것은 인권 논의에서 배제되기 쉬운 사회주의적 담론, 노동운동 그리고 여성운동에 중요한 가치를 부여한다는 점이다. 저자가 남자였다면 보편적 인권의 목록에서 여성이 생략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사회주의를 두려워하거나 거기에 매몰된 사람, 윌슨 류의 자유주의에 젖어 있는 사람이 읽어야 할 책이다. 내용이 구체적! 이고 번역이 유려하여, 몇 부분을 제외하면, 쉽게 읽힌다. 대학교 2학년생이면 이해할 수 있을 듯. 인권운동을 포함한 시민단체 활동가라면 꼭 읽어야 할 책이다. 프랑스혁명이나 미국 독립선언서에 보장된 인간의 기본권을 아직도 쟁취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사회 및 한반도의 현실이 답답하기만 하다. 그래도 이제는 한국의 인권역사를 정리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21. 알 고어 Al Gore, 김명남 옮김, <불편한 진실 An Inconvenient Truth> (좋은 생각, 2006).
지구온난화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제대로 아는 이는 드물다. 미국 부통령을 지냈으며 오래전부터 환경 전도사였던 지은이는 이 문제를 아주 쉽게 설득력 있게 정리하고 있다. 단순화나 과장의 위험에 빠지기도 하며 때로는 지나치게 순진한 주장을 펼치는 것은 이 책의 단점이다. 하지만 적절한 도표 및 환경 관련 사진들이 대중적 정치인인 고어의 깔끔한 주장과 잘 어우러져 있는 것은 장점이다.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해서 우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설명은 지나치게 개인적 차원의 자세와 방법만을 강조한다. 그 대신 기후 위기를 불러오는 산업적 메커니즘과 같은 구조적인 원인을 무시하고 은폐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적이기도 하다. 대학교 일학년이면 충분히 이해 가능. 동명의 다큐 영화도 볼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