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틈에 붙어서 자라기 때문에 겨우 겨우 살아가고 있다. 약 1천여 그루가 곧바로 크게 자라는 것이 아니라 많은 가지가 나와 전체적으로 관목모양의 나무가 많다. 절벽의 아랫쪽으로는 쉬나무, 느티나무, 회화나무, 말채나무, 자귀나무 등이 섞여 있다.
조선초기의 문신 서거정(1420-1488)은 그의 시문집 사가집(四佳集)에서 대구십영(大丘十詠)을 노래 하고 있다. 대구십경이라고도 하는데, 제6경 도동향림이 바로 이 측백나무를 두고 읇조린 내용이다.
북벽향림(北壁香林)이란 제목으로 실린 글’古壁蒼杉삭長/長風不斷四時香/慇懃更着栽培力/留得淸芬共一鄕’를 노산 이은상 선생은 ‘옛벽에 푸른 향나무 창같이 늘어섰네/사시(四時)로 바람 곁에 끊이잖는 저 향기를/연달아 심고 가꾸어/온 고을에 풍기세’라고 하였다.
옛날에는 앞을 흐르는 개울에 물이 깊었겠으나 지금은 물이 줄어 들어 이 곳을 대구십경의 하나라고 읇조린 경관의 아름다움은 거의 찾아 보기 어렵다. 숲 아래의 평지에는 관음사(觀音寺)라는 신라 고찰이 있고 여기에는 자연경관과 어울리지 않게 2층 절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절벽에 붙어서는 이곳 아홉 노인이 백락천의 향산구로회를 본받아 지었다는은 구로정(九老亭)이 부근에 있다. 또 바로 옆에는 대구 포항간 고속도로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서식지의 황폐화가 우려된다.
이 곳의 숲은 천연기념물 번호로서는 제일 빠른 1호인데, 일제 강점기인 1934년 천연기념물 관련 법률이 시행되면서 2호 합천 백조 도래지, 3호 맹산의 만주흑송 수림, 4 호 서울 통의동의 백송, 5호 서울 내자동의 백송으로 이어졌으나 미수복 혹은 고사 등의 이유로 해제되어 버리고 현재 1호 다음은 6호인 서울 원효로의 백송이다. 왜 이 측백나무 숲이 1호가 되었는지는 흥미롭다.
2002년 말 분포현황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측백나무가 자라는 면적은 3만5천600여㎡에 이른다. 지름 직경 6cm 이상인 측백나무만도 900그루나 되며 측백나무 군락 전체에서 측백나무가 차지하는 비율은 개체수로 보아서는 4.3%라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200년 이상된 측백나무가 900그루에 이르며 가장 나이 많은 나무는 965년이나 됐고 평균 나이는 344년이라고 한다.
측백나무란?
측백나무과 (학명) Thuja orientalis L. (영명) Oriental Arborvitae (일명) コノテカシワ (漢) 柏, 側栢
오래 전부터 선조 들이 즐겨 심던 나무의 하나이다. 천연기념물 1호로서 대구시 도동 향산의 측백나무숲이 지정되어 있고 충북 단양 매포의 제62호,경북 영양의 제114호,안동의 제252호의 측백나무 숲이 있다.
측백나무는 한자로 측백(側栢), 백자(栢子)이외에 잣나무와 같은 자인 백(栢,柏)로도 표기하므로 옛 문헌에서 잣나무인지 측백나무인지 구분이 어렵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중종34년(1540) 10월20일 전주 부윤 이언적이 올린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한 상소문의 내용에
– 옛날 이덕유가 당나라 무종에게 ‘군자는 소나무나 측백나무 같아서 홀로 우뚝 서서 남에게 의지하지 않지만, 간사한 사람은 등나무나 겨우살이 같아서 다른 물체에 붙지 않고는 스스로 일어나지 못한다.’-
구절을 인용하여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간하였다. 영조대왕의 묘지문(1776년)에는 – 장릉(長陵)을 옮겨 모신 뒤에 효종께서 손수 심으신 측백나무의 씨를 옛 능에서 가져다 뿌려 심고 ‘대개 영릉(寧陵)의 효성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하셨으니, 또한 임금의 효성이 끝이 없음을 알 수 있다- 하여 묘지의 둘레나무로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심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충북, 단양, 대구 등 석회암지대에 회양목과 같이 자라는 상록침엽수 교목으로 나무높이 25m, 지름 1m에 이른다. 나무 껍질은 길게 세로로 깊게 갈라지고 회갈색이다. 어린 가지는 녹색이며 편평하다. 잎은 비늘모양으로 끝이 뾰족하고 도란형 또는 난형으로 흰빛 점이 약간 있다. 꽃은 1가화로 4월에 핀다. 열매는 길이 1cm정도의 달걀모양이고 실편은 4∼6쌍이며 끝에 돌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