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내동의 입지와 자연환경

2004년 12월 30일 | 갑천생태문화해설사

읍내동의 입지와 자연환경
읍내동은 동쪽으로는 계족산, 서쪽은 갑천, 남쪽은 법동과 대화동, 북쪽은 신대동과 연축동과 인접해있는 동(洞)이다.
읍내동은 계족산 서쪽 끝과 당산 동쪽 사이의 잘 발달된 평지에 들과 회덕현의 관아와 부속시설 있는 곳이라서 마을 이름도 회덕현의 소재지라는 뜻으로 읍내(邑內)라 하였다.
읍내동은 회덕현 소재지였기 때문에 많은 역사와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다. 현재 회덕파출소 뒤쪽으로 조금 떨어진 야산 기슭에 향나무, 느티나무가 서있는데 이곳이 바로 회덕현감이 업무를 보던 동헌(東軒)터이다.
동헌터에서 남쪽으로 회덕 1동사무소가 있는데 이곳이 회덕현의 무관들의 집무처인 장청터이고, 다시 남쪽으로 200m정도 내려가면 회덕초등학교가 나타나는데 이곳은 회덕의 환곡을 보관하던 사창(社倉)터이다.
또한 큰길의 좌측편 당아래로 통하는 길목이 객사터이고, 객사터에서 100m정도 떨어진 신협 뒤쪽의 주택가가 죄수를 가두었던 옥터이다.
문화유적으로는 읍내의 동쪽에 자리한 뒷골에 제월당과 옥오재가 있고, 계족산 봉황정을 오르는 산중골에 용화사가 위치해 있는데, 용화사 경내에 석불입상이 봉안되어 있다.
또한 효자골에는 회덕향교가 있으며 동사무소 마당에는 관아 앞에 세워져 있었던 15기의 선정비와 불망비가 있다.
그리고 동사무소 뒤편에는 순조 때의 암행어사 홍원모의 공덕을 기리는 영세불망비와 비각이 있고, 뒷골과 당아래 마을에는 장승들이 수호신으로 마을을 지키고 있다.
현재의 읍내동 동쪽 계족산 자락에는 경부고속도로와 대전·신탄진간의 6차선 도로가 지나고 있으며, 철도·국도·고속전철이 읍내동 한복판을 관통하고 있다.
읍내동 동쪽의 고속도로와 6차선 도로 사이에는 우암 송시열, 동춘 송준길과 함께 회덕의 3송으로 일컬어지던 제월당 송규렴의 제택이 위치해 있다.
본래 제월당은 2천평이 넘는 대저택으로 조선후기 위세 있던 양반가로 자연과 잘 조화를 이루고 넓직한 공간구조를 지니고 있던 집이었다. 그러나 마당 가운데로 도로가 개설되면서 절반으로 줄어 원형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지금의 읍내동 모습에서 회덕의 중심지로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는 사실을, 주변에 문화유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믿을 수 없을 만큼 대전의 다른 변두리 지역과의 차이를 느낄 수 없다. 예전에는 당아래에서 회덕장(場)이 섰다.
◎ 읍내동의 연혁
읍내동 지역은 백제 때는 우술군(오천)이었다가, 신라시대에는 비풍군으로 개명하였고 그 밑에 유성현과 적오현(뒤에 덕진현)을 그 속현으로 두었다.
고려초기에는 회덕현으로 읍호를 바꾸었고, 이후 고려 현종 9년(1018) 이후에는 공주의 속현으로 귀속되었다.
그런데 고려시대에 유성현과 덕진현이 공주의 속현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 현종 9년 군·현의 개편시에 유성현과 덕진현이 회덕의 속현에서 벗어나 공주의 속현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후 회덕현은 고려 명종 2년(1172)에 처음으로 감무(조선시대의 현감과 같음)를 두게되어 주현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조선초기 태종 13년(1413)에 전국을 8도제로 개편하면서 행정구역을 서울→도→ 주·부·군·현→면(방·사)→리(동·촌)의 체제로 편성하였다.
이에 따라 회덕은 충청우도 공주목에 속하는 종6품의 현감이 다스리는 회덕현이 되었다. 이와 같이 8도제의 실시와 더불어 소현의 병합이 이루어졌는데 이때 유성현이 폐지되면서 그 영역이 회덕현과 진잠현에 속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