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여택 정려
신양리 길가의 기와지붕 누각에 효자 안여택의 정려가 있다.
안여택은 조선조 숙종에서 정조대의 인물이다.문성공 안향의
17세손이기도 하다.
부모에 대한 효심이 매우 깊어서
모친과 계모의 병환시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병자에게 먹여
병간호를 하였고.
부친이 위독하자 변을 맛보아 병세를 판단하며 간호하고
또한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어 생명을 몇일 연장시키기도
했다고 한다(효험이 있는지 의문이지만 옛효자 효녀들은
이렇게 해서 부모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다는 징표일까?)
또한 안여택은 마을에 양곡학당을 설립하여 교육사업에도 힘썻다고 한다.
정려란
효자, 효부, 열녀에게 내리는 나라의 표창장이다
당시사람들은 정려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컸다
동네 입구에 잘 보이는 곳에 세우고, 타지 사람들에게 우리 마을이 이렇게 유서 깊은 곳이다라는 것을 자랑하였다.
우명동 시루봉의 상수리나무
우명동 야트막한 시루봉에 올랐다.
마을입구에 자리잡은 야트막한 산에는 들머리부터 묘의 행렬이 이어진다. 묘등을 타고 떼길을 올라가다보면 금새 꼭대기다
맞은편에 조동이 보이고 작은 산아래 물길이 이어져 흐르는게
한눈에 보인다.
시루봉 꼭대기에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상수리 나무가 있다.
가운데 상수리 나무를 두고 7그루의 소나무들이 둘러싸고 있는게 인상적이다. 소나무가 상수리나무를 호위하는 듯한 포즈이다.
소나무 가지가 상수리를 피해서 바깥쪽으로 있는게
아마도 상수리 넓은 잎 때문에 햇빛을 못받으니 피한게 아닐까
예전엔 정월 보름이면 이 신목아래에서 산신제를 지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고 한다. 이제 쓰지 않는 제단이 쓸쓸해보인다.
마을 입구에도 약 200년 정도 된 느티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오동의 선돌
선돌은 길다란 돌을 세워놓은 형태이다
선사 시대에, 자연석이나 약간 다듬은 돌기둥을 땅 위에 하나 또는 여러 개를 세운 거석 기념물이다.
자기 부족의 영역을 표시하기 위하여 세웠거나
마을의 수호신으로 세워놓았을 수 있다.
오늘 날에는 마을이름을 안내하는 표석으로 많이 볼 수 있다.
옛날 갑천의 어느 부족을 지키는 수호신이었을지 모를
오동 선돌은 길옆 버스표지판 아래에 비스듬히 쓰러지려는
자세로 서있다.
이제는 누구도 그 존재를 중히 여기지 않는다.
평촌동 도선바위
옛부터 이 마을을 연동진남 가활만인의 길한 곳으로 여겼다.
연산의 동쪽 진잠의 남쪽이 가히 만명을 살릴 수 있는 곳이라는
이야기다.
실제 한국전쟁 때에 각지에서 모여든 피난민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 때에 마을이 큰 화를 입지 않은 것을 이 풍수설에
근거가 있다고 마을 사람들은 믿고 있다.
평촌동 마을 회관 앞에 있는 넓적한 돌이 도선바위이다
북방식(탁자식)고인돌로 추정하며,
굄돌이 없어진 덮개석만 남아 있다.
본래 마을회관 길 건너 방앗간 앞에 있었으나 신작로를 낼때
이곳 마을 회관 앞으로 모셨다고 함.
도선대사가 이곳이 무만문천(무신 만명 문신 천명)이 날 좋은
곳이라고 하며 춤을 추었다는
일화가 내려 오고 있어서 도선바위라고 하고 있다.
평촌동 고인돌 7기
야산에 고인돌의 크고 작은 덮개석이 몇발자욱 거리에
흩어져 있다.
최지형샘이 “북두칠성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네요”
라 한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런것 같다.
평촌 꽃산
해발 82m의 야트막한 산이다
산 아래쪽에 바위가 꽃이 핀 모양 같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산을 끼고 갑천이 흐르고 산 아래 깊은 소가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엔 낙화정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고 한다.
강 건너는 증촌마을이고
넓고 기름진 들판이 펼쳐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