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7시까지 아침식사를 하러 내려오라는 어제의 당부에 우린 안떠지는 눈을 억지로 벌리며 새아침을 맞이하였습니다.
후래쉬 켜놓고 주무셨다는 맘여린 현숙님께서 이미 깨끗이 씻고 이방저방 노크하며 우리를 깨워주셨고, 엉겁결의 초인종소리에 저는 까만방에서 현관문인줄 착각한 화장실문을 열고 그안에다 “누구세요?”를 외치며 덜 깬잠을 깨우고 있었습니다.
창가에 펼쳐진 아침바다, 창으로 들오는 비릿한 바다내음,
이제 아침을 먹고 내려온 우리는 7시50분에 있다는 배편을 위하여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보길도로 향하는 바다는 그날 내내 내린 비로 인하여 아주 흐린 풍경이었습니다.
바다를 가득메운 양식장비들 때문에 푸른바다 넘실대는 파도의 그림은 그려지지않았지만,
우리 좋은 선생님들과 배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 나와있다는 뜻깊은 기회 그자체가 너무 좋기만 하였습니다.
비를 피하려 들어온 선실에서 고등학교 수학여행의 그 기분으로 돌아가 삥 둘어앉아 게임도 하고, 틀린사람 엎드려 몰매도 두둘기고…다른팀들이 부러운 듯 시끄러운 듯 쳐다봐도 우리는 아랑곳 할 수 없는 즐거움이었습니다.
50여분 후에 이윽고 당도한 보길도.
우리는 시내버스 하나를 대여해 익숙하고 노련한 기사님의 해설을 벗삼아 세연정에 당도하였습니다.
세연정은 시인 윤선도가 세상사 정치행각에 울분을 참지못하고 제주도로 향하다가 자연경관에 감동해 머문 섬 보길도. 섬 안 개울가에 연못을 파고, 집을 세워 자연을 벗삼아 뱃놀이를 하며 세월을 보낸 곳으로 자연을 이용하여 인공의 멋을 접목해 조화로운 풍광을 연출한 장소였습니다.
이 곳 안 정자에 둘러앉은 우리는 임헌기님의 해설뒤에 이어진 문화연대에서 오신 남자분의 판소리를 감상하며 그 시절 뱃놀이를 하며 유유자적 시를 읊고, 지으며 노래한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와 같은 과거로 돌아가는 시간을 갖기도 하였습니다.
동천석실로 가는 길은 버스에서 내려 20여분을 산으로 올라가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비로 인하여 다소 미끄럽기는 했지만, 산 올라가는 내내 여러나무들이 이름표를 붙인 채 서 있어 관심이 많은 우리들의 눈요기와 구미를 끌어내기에 충분했었습니다.
산 중턱 바위에 세연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그곳까지 본인은 가마를 타고 올라오지를 않았나, 필요한 주안상이 있으면 줄을 매달아 케이블카처럼 올려보내지를 않았나…참으로 윤선도는 돈 있는 집 사람이라지만, 가진 호사는 다 부리고 살았다는 생각에 어제의 정약용과 비교하여 그리 탐탁치않은 인물로 자꾸 그려지기도 했었습니다.
이제 예송리 바닷가로 나갈 차례입니다.
공룡이 알을 낳은 듯 아주 커다란 돌들이 둥글둥글한 모양으로 바닷가에 깔려있는 것이 참 신기했으며, 큰 돌을 주워 옛다 집어던지면 이 둥그런 돌들이 돌에 부딪히면서 마치 축구공이 튀듯이 튕겨내려가기를 서너번 하는 것이 너무나도 신기하였습니다.
바다를 둘러쌓고있는 상록수림은 이곳 주민들이 태풍을 피하기 위하여 만든 숲으로 반달모양의 아주 아름다운 숲이었고, 이 곳에 심어진 나무의 종류만 봐도 예사스럽지않을 자연체험학습의 장이었습니다.
다시 선착장이 있는 바닷가로 돌아와 식당에서 점심을 낙지볶음으로 맛나게 해결하고,
이곳 섬이 톳이나 전복등의 양식업을 주로 하다보니 다른 섬들에 비해서 비교적 부유하고, 굳이 식당업 같은 것들로 인하여 업을 삼지않아도 될 만큼 거만한 주민성향을 갖고있다는 해설도 듣게 되었습니다.
점심을 먹은 우리는 작고 둥근 돌들로 이루어진 예송리해수욕장을 만났습니다.
이곳의 돌들은 아까와는 반대로 아주 작고 둥근 것으로 만나는 물살에 아주 반짝이고 윤이나는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파도가 밀려나면 물살에 돌 구르는 소리가 아주 청하해서 야밤 아무도 없는때에 이 돌 구르는 소리를 다시 들어보리란 생각도 해봤고,
우리모두 돌들을 한주먹 집어던져서 퐁당퐁당 소리 나는 것에 까르르 신이나 웃음 참지못하고 좋아하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웃음이 나온다는 그 여고생들이 이 예송리 바닷가에 또 나타난 것이었으니까요.
그곳 기사님 왈 “돌장난 하나가지고도 저렇게 재밌게 노는 아줌마들은 첨 보았지요”
오며가며 예송리바닷가를 가는 차편에서 또하나의 보물을 발견한 것이 하얀동백이었지요.
보길도에 한구루있고, 다른 지역에도 그리 흔치않은 아주 귀한 보물을 우리는 본 것이었습니다.
이제 배를 타고 다시 해남 땅끝마을로 향합니다.
배안에서 계속된 우리들의 정겨운 이야기는 이 후기에 일일이 열거하기엔 너무 많고 벅차기에 삼가기로 하겠습니다.
다만 이 여행을 통해서 선생님들이 모두 한결같이 예쁜 품성과 마음을 가지셨구나.
모두 한결같이 열심히 노력하며 사는 훌륭한 한 가정의 주부로구나.
모두가 이 꿈결같은 만남을 귀이 여기고, 영원한 좋은 관계로 지속해야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똑같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마음 예쁘고 언니처럼 걷어먹이려 애쓰는 완숙님이 더 미덥고 새롭게 느껴지고,
귀여움이 새록새록 살아나는 새색시같은 희자님이 더 다감해지고,
언제 애엄마가 되었는지 아쉽기만 한 젊고 예쁜 대학생 경해동생님이 더 사랑스러워지고,
알뜰하고 현명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바지런하고 기특한 혜란님이 더 굳세어보이고,
몸 아파 맥 못추는 씩씩이 영미씨가 애잖아보이지만, 말없이 안아픈 척 분위기 해치려않하고 애쓰는 모습이 측은하고 가상한 영미님이 더 미더워보이고,
맘 여리고 착한 현숙님이 모처럼 여행에서 더 마음의 휴식과 진정한 친구들을 찾은 듯 기뻐하는 모습이 더 좋아보이고,
바쁜 와중 귀한 참내어 어른스러운 면모로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신 승미님이 더 귀하게 느껴지는…
아주 의미있는 배안풍경이었습니다.
다시 아침에 헤어졌던 익숙한 버스 그 자리에 몸을 싣고, 해남 방산리의 장고봉 고분으로 향합니다.
위에서 보면 장고모양을 한 6-70여미터의 큰 무덤으로 일본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기도하지만, 정확한 학술조사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흥사로 향하는 버스안은 조용한 잠을 청하는 시간.
이틀의 노곤한 여정과 어제 못이룬 잠을 청하느라 약속이나 한 듯 모두 적막하고 어두운 차안입니다.
해남 두륜산에 위치한 대흥사.
우리가 묶을 숙소는 대흥사가 이곳 식당가들을 모두 매표소 아래로 철거시키고 전통의 유선장여관만 남겨놓은 곳이었습니다.
유선장여관은 전통한옥의 구조로 문풍지 창살문에 문틀없는 마루, 방안은 화초장위에 갖가지 도자기로 진열이 되 있었고, 병풍과 고풍스런 한국화가 사방을 치장하고, 이불은 원앙금침, 밥상은 놋그릇 식단을 들고들오는 한정식, 그리고 방안은 고급차와 다기잔…
여덟명이 한방에 들어오면서 일제히 입을 딱~~~~벌리고는 다물 줄을 몰랐습니다.
아이구 좋아서 이불위에 누워도 보고, 방바닥에서 뒹굴고… 이쯤되니 여고생이 아닌 여중생으로 돌아가 버리더군요.
식사는 작은방에 차려져 맛깔스럽고 정갈한 한정식으로 이어졌습니다.
딸려나오는 동동주를 우리선생님들이 마다한 것은 이따 있을 다도시간이 기다려지는 이유때문이기도 하였겠지요.
이희자선생님이 차를 덕어주시고, 우리는 임헌기선생님을 모시고 안여종선생님, 정간사님과 함께 정말로 진지한 해설의 기법과 갑천생태문화해설사들의 나아갈 길에 대한 강의를 또 들을 수 있었습니다.
왜 교육 초입에 임헌기선생님의 강의가 없었는지 아쉬움이 남을 만큼 우리에게 거는 기대와 우리가 필요한 이유, 우리가 헤쳐나가야 할 어려운 문제들을 사심없이 집어주시고, 토론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두어시간 동안 몇잔의 차를 마셨는지도 모를 만큼 아마도 정다산도 이렇게 초의선사와 차를 나누면서 날밤을 새우셨구나…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때문에 희자님은 열심히 차를 만들어주시는 날렵함과 수고스러움을 감당해내야 했으니까요. 참으로 희자님은 여러모로 우리팀의 보배임이 날로 입증되는 순간들이었습니다.
정말 좋은 시간 갖게 해주신 희자선생님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내일 3시경 있을 법고 두드리는 소리를 같이 경청하자고 합의한 우리들이 불을 끈 시간은 11시경. 그러나 나즈히 히어진 몇몇선생님들의 대화는 새벽 1시가 되어도 끝날 줄을 몰랐습니다.
초저녁 완숙언니가 갖고 들오실 때 과연 누가 사용하겠느냐… 의아해하며 웃음짓던 그 요강은 이미 두어사람에게 요긴하게 쓰여져 적당히 채워져있었고, 우리의 웃음소리에 잘 자던 사람들도 깨우다 말다하면서.
고스돕 피해 도망나와 숨어들은 옆방 해설사님과 이 얘기 저 얘기도 나누고..
우리는 어떻게 꿈나라로 갔는지…하여튼 오늘은 그렇게 마무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