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조사-야실마을

2004년 11월 17일 | 갑천생태문화해설사

조사마을:야실마을
조사자:심현숙,최수경, 이경해선생님
만난이:조양준할아버지(72세, 봉곡2동 64-1번지, 584-3106)
1.마을의 어른들:
최고령 100세 안노인네(여,며느님이 모시고 삼)
유근서할아버지(93세,외지에서 이사와서 동네에 관심이 없음)
동갑내기 김영신할아버지와 본인 조양준할아버지
2.야실의 유래:
야실매의 약자라는 것 말고는 달리 알지 못하심.
3.가구수:
옛날에도 30여호 지금은 27호로 빈집이 2호 있었고,수구막이를 돌아가면 8호가 더 있음.
4.수구맥이 소나무:
흙을 지개로 퍼날라 둔덕을 만든 후 소나무를 심음. 수령 200여년.
나뭇가지로 논에 그늘이 져도 가지를 꺾거나 나무를 헤아지 못하는 동네의 규약이 있음.
마을왼쪽 바위가 더 옆으로 튀어나왔으면 산세가 더 좋았을텐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쉬움.
수구막이를 위해 바위옆으로 마을을 둘러치며 느티나무를 심어놓았으나 다 죽음.
5.둥그나무;
마을입구의 느티나무를 말하며, 63년전 흑석산성이 있는 산에서 어린묘목을 캐다가 심었으며, 2년전 61년을 기념하는 회갑연을 못해준게 못내 한이 됨.
6.제방:
한듬산(대둔산)천과 신도안(두계천)이 만나다보니 비많이 오는 여름이면 물 넘기를 밥먹듯이 했고, 아래 보 때문에 밑에서 물이 먼저 차 올라 옴.
자다가도 징소리가 나면 모두 산으로 올라가야 했고, 하여 미리 산위에다 하우스를 지어놓고, 만약을 대비하기도 함. 산에 나무가 없다보니 집집마다 멍석을 쳐서 물길을 막기도 함.
정부에서 논을 사들여 천을 넓히고 제방을 높게 쌓아줌.
7.떼다리:
자고일어나면 다리가 떠내려가서 섬이나 다름이 없어 학교도 못다님.
갈목을 받히고 대못을 밖은 후 동아줄로 묶어서 두꺼운 떼를 떠서 올려놓았음.
밟고 지나가면 출렁이다보니 양쪽에서 요동을 잘못타면 다리에서 떨어져 강으로 떨 어지기 일쑤. 강둑이 높아지기 이전엔 강가에 떼가 많았지만, 산에 나무가 귀해서 떼다리도 쉽게 놓을 수 있는게 아니었음.
8.아나방;
구멍 송송 뚫린 쇠판을 위에다 올려놓은 다리로 아침에 자고 일어나니 아나방을 훔쳐들고 갔음. 삐닥구두 신은 처녀의 구두뒷축이 구멍에 빠져 애먹는게 재미있었음.
대덕군수가 세면돌이 600포대를 주고 시멘트다리를 놓았으나, 이도 홍수에 떠내려가서 지금의 이 다리를 놓게 되었음.
9.야실교:
다리중앙이 폭 올라와야 하거늘, 푹 꺼져서 영 보기도 싫다고 함.
다리밑에 버드나무가 크게들 자라고 있어 행여 큰물이 나면 물이 넘치거나 있는 다리에도 좋질 않을 것 같으니 죽기전에 힘좋은 사람들이나 정부에서 꼭 베어주었으면 하는 바람.
10.교통편:
버스를 타려면 구름다리까지 가야하는 불편함이 있어 살기가 참 않좋은 동네라고 불평.
11.시장:
한나절하는 흑석장에 갔었으나, 대전으로 버스를 타고 나가거나 농협으로 간다고.
12.도로포장:
이종태라고 하는 이장이 밭주인과 땅주인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며 허락맡아서 마을길을 죄다 시멘트포장을 해주었음. 공덕비라도 세워주자고 했으나 의견이 분분하여 해주지못하고 작년에 돌아가심. 이 마을이래 최고의 공을 들인 인물이라 평함.
13.어로행위:
옛날에는 모래무지 등 많은 물고기를 회로 먹기도 했으나, 근래에는 익혀먹어야 함.
두계천보단 갑천쪽의 물살이 세서 물고기의 맛도 좋고, 다슬기의 맛도 좋음.
14.바위 위 불상:
금년 목수일을 하는 마을사람이 이사를 와서 불상을 세워놓았으나 마을에 좋다고하니 아무도 말이 없음.
배추밭에서 일을 보시던 할아버지를 만나 익히 인터뷰 경험이 있으신 듯 술술 풀어내는 말씀 뒤에 집에가서 차라도 한잔하자며 집으로 안내를 하셨다.
도시 아파트공사장으로 일나가신 할머니가 않계신 빈집이었지만, 부지런한 할머니는 집안 곳곳 깨끗하지않은 곳이 없을 만큼 살림이 반짝거렸으며, 할아버지 점심반찬으로 조기두마리를 후라이팬에 쇠고기국을 가스렌지에 구운김까지 준비해놓으시는 정성을 보여주셨다.
배산임수라 야실마을은 참으로 낭만과 멋이 있는 살기좋은 동네로겠다 생각했으나,
속내를 알고보니 넘는 물로 인하여 한시도 편한 날이 없었던 동네, 지금도 버스마저 들오지 않아 사람살기 불편한 동네, 자손대대 누구하나 잘 된 사람이 하나없는 동네…
물난리와 고립 속에서 속을 썩고 살다보니 자식들도 흔들림이 많았었구나…하는 마음이었다.
아이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시골동네에 말벗이 되어드린 것 같아 흐믓했고, 아직도 시골은 이렇게 정이 남아있구나 하는 안도감에 마을을 뒤로 한 다리를 건너며 발걸음이 경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