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월 12일 금요일(5시간) : 갑천상류의 마을 조사(평촌, 증촌 / 미림이, 정방이 / 원정, 세편이, 구만이 / 야실, 유천동 / 대추벌, 안쇠점, 바깥쇠점)
: 마을 조사 후 발표 / 3인 1조
갑천상류지역의 마을 중 대표적인 마을을 해설사들이 3인 1조로 나누어 조사하고 이를 발표하는 의미있는 시간을 가져본다. 마을 주민을 직접 만나 마을의 유래와 마을제의 유무, 이마을의 연장자는, 재미있는 마을 이야기, 마을의 상징, 버스 시간표, 옛날 마을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갑천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옛날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마을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등을 조사하여 각조별로 발표하는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1. 평촌동(坪村洞)
〔위치〕대덕구 북쪽에 위치하고, 동쪽은 장동(長洞)과, 남쪽은 상서동(上書洞)과, 서쪽은 덕암동(德岩洞)과, 북쪽은 석봉동(石峰洞)·용호동(龍湖洞)과 인접해 있다.
〔유래〕마을이 벌판에 있으므로 벌말 또는 평촌(坪村)이라고 하였다.
〔연혁〕백제 때는 우술군(雨述郡), 신라 때는 비풍군(比豊郡), 고려 초기에는 회덕현(懷德縣), 고려 현종(顯宗) 9년(1018) 이후에는 공주부(公州府), 조선 고종(高宗) 32년(1895)에는 회덕군 북면(北面)에 소속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에 따라 귀암리(貴岩里), 하서당리(下書堂里), 덕운리(德雲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평촌리라 하여 대전군 북면에 편입되었다. 1935년 11월 1일 대전읍이 대전부로 승격됨에 대덕군 북면에 편입되었고, 1973년 7월 1일 북면이 읍으로 승격됨에 신탄진읍 평촌리가 되었다. 1989년 1월 1일 대전시가 대전직할시로 승격됨에 따라 대전직할시 대덕구 덕암동에 소속되었다.
<지명>
거북바위(귀암(龜岩))〔바위〕
〔위치〕무지니마을에서 동쪽에 있다.
〔유래〕바위 모양이 거북이와 비슷하여 거북바위라고 부른다.
고사리밭골〔골〕
〔위치〕서당골에서 북서쪽에 위치해 있다.
〔유래〕옛날에 이 골짜기에 고사리가 매우 많아서 이를 고사리밭골이라고 불렀다.
〔특이사항〕지금은 이 자리에 신탄진연초공장이 들어서 있다.
국제빌라〔빌라〕
〔위치〕정림맨숀에서 동쪽에, 덕암주공아파트와 한라맨숀 사이에 있다.
길헌초등학교〔학교〕
〔위치〕한국담배인삼공사 부근에 있다.
다랭이(다랑이)〔들〕
〔위치〕대전철도차량정비창 뒷쪽에, 윗다랑이와 아랫다랑이 사이에 있다.
〔유래〕지형상 다랑이가 많아서 이를 다랑이라고 부른다. 과거에는 상서동이었으나 지금은 평촌동이다.
달수생이〔마을〕
〔위치〕새터마을에서 동쪽에, 무지니와 성주골 사이에 있다.
대원아파트〔아파트〕
〔위치〕덕암주공아파트에서 바로 동쪽에, 대전동부소방서 신탄진파출소에서 남서쪽으로 도로 건너에 있다.
무지니(청자마을, 귀암(貴岩, 龜岩))〔마을〕
〔위치〕고사리밭골에서 동쪽에, 새터에서 북동쪽에, 태양마을에서 바로 동남쪽에 있다.
〔유래〕마을 뒷산에 거북바위가 있으므로 구암이라고 부른다. 동네가 무진장하게 발전한다는 의미에서 무진이라고 부른다. 이는 옛날의 이름이고, 현재는 청자라는 담배 이름을 따서 청자마을이라고 한다.
벌말(평촌(坪村))〔마을〕
〔위치〕새터에서 남서쪽에 있다.
〔유래〕비산비야(非山非野) 즉 얕으막한 산밑에 펼쳐진 넓은 벌판에 조성된 마을이라 하여 벌말 또는 평촌이라고 부른다.
〔특이사항〕옛날에는 마을이 있었으나, 현재 이 마을에는 철도공작창이 들어서 있다.
새터(신대(新垈))〔마을〕
〔위치〕서당골에서 남쪽에, 한국담배인삼공사 사택에서 바로 동북쪽에 있다.
〔유래〕옛날에 평촌과 한동네였다가 새로 갈라져 나온 마을이라 해서, 이를 새터 또는 신대라고 부른다.
서낭당고개(장고개)〔고개〕
〔위치〕상서당마을과 장동 욧골마을 사이에 있다. 황새봉에서 동쪽에 있다.
〔유래〕이 고개에 서낭당이 있다고 해서 이를 상서동에서는 서낭당고개라고 부른다. 또 이 고개를 왕래하여 장동 욧골에서는 신탄진 시장을 이용하기 때문에 이를 장동 욧골에서는 장고개라고 부른다.
서당골(아래서당, 하서당(下書堂))〔마을〕
〔위치〕새터에서 북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유래〕옛날에 이곳에 서당이 있었으므로 이를 서당골이라 부른다. 또 상서동에도 서당이 있어서 그쪽 서당은 지형상 위쪽이 되므로 상서당이라 하고, 이쪽은 하서당이라고 한다.
〔특이사항〕고사리밭골 부근으로서 옛날에는 마을이 있었으나 현재는 이곳에 한국담배인삼공사가 들어서 있다.
소망장로교회〔교회〕
〔위치〕덕암주공아파트에서 동쪽에, 국제빌라에서 북쪽에 있다.
승주골(성주골)〔골〕
〔위치〕철도공작창 뒤에, 다랑이에서 북쪽에 있다.
신탄진덕암주공아파트〔아파트〕
〔위치〕호성주유소와 정림맨숀 사이에 있다.
아랫다랭이(아랫다랑이)〔들〕
〔위치〕다랑이의 북쪽에 있다.
〔유래〕대전철도차량정비창 뒤쪽에 있는 다랑이를 중심으로 하여, 지형상 위쪽에 있는 다랑이를 윗다랑이라고 하고, 아래에 있는 다랑이를 아랫다랑이라고 부른다.
〔풀이〕’다랑이>다랭이’에서 ‘랑>랭’의 ‘ㅏ>ㅐ’는 움라우트 현상이다.
양촌(梁村)〔마을〕
〔위치〕평촌에서 북동쪽에, 새터에서 남쪽에 있다. 현재 철도공작창 위치이다.
〔유래〕지금부터 약 500년 전에 양씨(梁氏)가 처음 이 마을에 거주하였으므로, 이를 양촌이라고 부른다. 옛날에는 주로 양씨가 많이 사는 마을이었으나, 현재는 철도공작창이 들어서 있다.
연립상가빌라〔빌라〕
〔위치〕덕암주공아파트에서 남쪽에, 정림맨숀에서 서쪽에 있다.
전매공사아파트〔아파트〕
〔위치〕한국담배인삼공사 연수원과 태양마을 사이에 있다.
장고개(황서방고재)〔고개〕
〔위치〕다랭이와 장동 양먹골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정림맨숀〔아파트〕
〔위치〕덕암주공아파트에서 남쪽에 있다.
충성장로교회〔교회〕
〔위치〕대전덕암동우체국에서 동쪽에 있다.
태양마을〔마을〕
〔위치〕무지니마을과 전매공사아파트 사이에 있다.
〔유래〕옛날에는 산이었으나 현재는 마을이 들어서 있다. 이 마을은 담배 이름 태양을 따서 붙인 것이다.
평촌교〔다리〕
〔위치〕대청주유소에서 동쪽으로 경부선철로 건너에 있다.
〔특이사항〕과거에는 이 다리를 이용하여 회덕과 신탄진을 왕래하였으나, 현재는 차량 통행이 금지되고 사람만이 왕래하고 있다.
한국담배의료보험조합〔법인〕
〔위치〕한국담배인삼공사 단지내에 있다.
한국담배인삼공사〔기관〕
〔위치〕대전철도차량정비창에서 북쪽에 있다.
한국담배인삼공사사택〔주택〕
〔위치〕새터마을에서 서쪽에, 서당골에서 남쪽에 있다.
한국담배인삼공사 연수원〔기관〕
〔위치〕한국담배인삼공사 단지내에 있다.
한라맨숀〔아파트〕
〔위치〕정림맨숀에서 동쪽에, 국제빌라에서 남쪽에 있다.
한사랑교희〔교회〕
〔위치〕연립상가빌라에서 남쪽에 있다.
<토속>
평촌동의 서당골
이곳 서당골에는 옛날 백제 때 마을 뒤 성재에서 적군에게 부상을 당하여 신음하는 군사를 극진히 간호하고 드디어 그 아내가 된 마을 처녀와 그 처녀의 다정한 친구가 우정으로 뭉쳐 그 한 남자를 일생동안 이어서 섬겼다는 두 처녀의 인정가화(人情佳話)를 담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2. 용촌동(龍村洞)
〔위치〕법정동인 용촌동은 동쪽에는 매노동이 있고, 서쪽에는 원정동, 남쪽에는 평촌동이 인접해 있다. 그리고 북쪽에는 봉곡동과 이웃해 있다.
〔연혁〕용촌동은 백제(百濟) 때 진현현(眞峴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 때는 진령현(鎭嶺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 때는 기성부(杞城府)에 속했다가 뒤에 공주부의 영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진잠현(鎭岑縣)에 속했다. 조선시대 말기 고종(高宗) 32년(1895)에는 진잠군 하남면(鎭岑郡 下南面)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정방리(貞坊里), 삼정리(三亭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용촌리(龍村里)라 하고 대전군(大田郡)에 편입되었다가 1935년 11월 1일 대전읍(大田邑)이 대전부(大田府)로 승격함에 따라 대덕군(大德郡)에 편입되고 1989년 1월 1일 대전시가 직할시로 승격함에 따라 대전직할시 서구(西區)에 편입되었다. 현재 행정동은 기성동(杞城洞)이다.
<지명>
갑천(甲川)〔내〕
〔위치〕상류(上流) 논산군 두마천(豆磨川;鷄龍川(陰水))이 논산군 벌곡천(伐谷川;大芚川)과 용촌 하류 지점과 봉곡동 상류에서 합류하여 갑천 상류를 형성하며, 흑석동, 가수원동, 둔산동 등을 거쳐 삼천동에서 유등천, 산내천 등과 재합류하여 신탄진 금강 상류로 흐르고 있다.
미리미(미림리(美林里), 용촌(龍村))〔마을〕
〔위치〕시누리 서쪽으로 들건너에 있는 마을이다.
〔유래〕마을 입구에 용두처럼 생긴 바위가 있고, 뒷산을 용산(龍山)이라 부르는데 해발 133m의 낮은 산이다. 형상이 용이 누워 있는 것처럼 생겼다고 하여 그리부른다.
〔풀이〕미림리>미림니>미리미로 변하였고, 줄여서 미림이라고도 한다. 미리는 용의 고어이다.
미리미느티나무〔나무〕
〔위치〕용촌 산 39번지에 있는 느티나무이다.
〔특이사항〕옛날 정자가 있었던 자리 부근에 남은 4그루의 느티나무가 용머리 바위에 의지하여 자라고 있다. 그 중 6-3-10-4로 지정된 느티나무의 수령은 298년, 수고는 21m, 나무둘레는 3.8m로 1982년에 동나무로 지정되어 용촌동 산 39번지의 정병일 씨가 관리하고 있다. 지금은 논으로 변했지만 앞에 큰 연못이 있어서 낚시질을 했었고, 뒤에는 풍치림이 있어서 운치를 더해 주고 있다. 얼마 전만도 용머리 바위에 치성드리는 무속도 있었지만, 지금은 피서객들의 주간 휴식처가 되었다.
삼노정(三老亭)〔정자〕
〔위치〕시누리 입구 좌측 모퉁이에 5그루의 느티나무가 절경을 이룬 곳에 있던 정자 이름이다.
〔유래〕옛날에는 시누리 앞쪽으로 개울이 흘렀으며, 그 때 세 노인이 마을 어귀 바위 위에 앉아 낚시질을 했다고 한다. 그곳에 정자를 세워 시누리 정자라 불렀는데 한자로 삼노정(三老亭)이라 한다.
〔특이사항〕진잠팔경(鎭岑八景)중의 일경으로 알려져 있다.
서당골(서당곡(書堂谷))〔마을〕
〔위치〕용촌(龍村)의 뒤 원정 뒷골 입구에 있는 마을이다.
〔유래〕옛날에 서당이 있었기 때문에 생긴 마을 이름이다.
시누리(삼점리(三亭里))〔마을〕
〔위치〕미리미 동쪽으로 들 건너에 있는 마을이다.
〔유래〕원래는 삼노정(三老亭)이라고 부르던 것을 일제 시대에 삼정리로 개칭했다고 한다.
〔풀이〕세누리>시누리로 변한 것 같고, 세노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시누리느티나무〔나무〕
〔위치〕용촌 산 121번지에 1982년 11월 1일에 마을나무로 지정된(6-3-10-8) 느티나무이다.
〔특이사항〕부근에 자목이 42그루가 자라고 있다. 이 나무의 수령은 198년, 20m가 넘고, 나무 둘레는 2.7m로 삼노정터 바위와 길가에 의지하여 자라고 있으며, 마을 앞에는 수령이 꽤 오래된 버드나무 1그루가 있다.
연못들〔들〕
〔위치〕용촌동 시누리 앞을 가로질러 안쪽에 있는 들이다.
〔유래〕길 바깥쪽이 고바윗들인데, 옛날 연못들 가운데에 연못이 있었기 때문에 연못들이란 이름이 생기고, 이 들에 물을 대는 보를 연지보라 했다 한다.
용산(龍山)〔산〕
〔위치〕미리미(龍材) 뒷산으로 해발 133m의 야산이다.
〔유래〕용처럼 생겼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용촌교(龍村橋)〔다리〕
〔위치〕대둔산에서 흐르는 벌곡천 물이 용촌 앞을 가로지르는 교량이다.
〔특이사항〕1981년 7월 10일에 준공한 철근콘크리트 교량으로써 그 다리 옆에는 명주환(明柱煥) 기념비가 건립되어 있다. 그는 천석군으로써 지역봉사로 적선을 하였기에 그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용촌수영장(龍村水泳場)〔수영장〕
〔위치〕미리미내 용촌교 상하에 자리 잡고 있는 천수 수영장이다.
정방들(정방평(貞坊坪))〔들〕
〔위치〕정뱅이 앞의 들을 지칭한다.
정방보(貞坊洑)〔보〕
〔위치〕갑천 상류에 있는 보로 정방들에 농수를 공급한다.
정뱅이(정방리(貞坊里))〔마을〕
〔위치〕미리미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유래〕이 마을을 기점으로 대둔산에서 내려오는 벌곡천과 계룡산에서 내려오는 두계천이 합류하여 갑천(甲川)이 된다. 백제 시대 소정방(蘇定方)이 이곳에 진을 쳤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고도 와전된다. 또는 옛날 신라와 백제가 싸울 때 이 마을에서 흑석리 쪽으로 보이는 산성에 소정방이 진을 치고 있었으며, 정방지에서 하룻밤을 자고 갔다 하여 정방리라고 했다 한다. 또는 소정방이 이 마을을 지나다가 오줌을 싸고 갔는데, 마을 이름이 없기에 자기 이름을 붙여 소정방이라고 했던 것을 뒤에 정방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모두 와전된 말이다.
〔풀이〕정방리>정뱅니>정뱅이로 변천된 것 같다.
정뱅이느티나무〔나무〕
〔위치〕용촌 산 13번지에 동나무로 지정된(8-4-9-3) 느티나무 2그루이다.
〔특이사항〕수령 289년, 수고는 21m, 나무둘레는 3.4m로 정뱅이 마을 왼쪽에 위치하여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현재 용촌 13번지의 채원석씨 소유로 되어있다.
3. 원정동(元亭洞)
〔위치〕서구의 남단에 위치한 원정동은 동쪽에 용촌동과 접해 있고, 서쪽에는 두계천을 경계로 논산군 두마면과 시계를 이룬다. 그리고 남쪽에는 우명동과 북쪽에는 봉곡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법정동이다.
〔연혁〕원정동은 백제(百濟) 때 진현현(眞峴縣)에 속했으며 신라(新羅) 때는 진령현(鎭嶺縣)에 속했었다. 고려(高麗) 때는 기성부(杞城府)에 속했다가 그뒤에 공주부에 속했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진잠현(鎭岑縣)에 속했었으며 마을앞에 큰 정자가 있으므로 원정이라 부르던 지역으로 조선시대 말기 고종(高宗) 32년(1895)에는 진잠군 하남면(鎭岑郡 下南面)에 속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금청리(金靑里), 발현리(鉢峴里), 중산리(中山里), 덕동리(德洞里), 우명리(牛鳴里) 일부를 병합하여 원정리(元亭里)라 하고 대전군(大田郡)에 편입되었다. 그러다가 1935년 11월 1일 대전읍(大田邑)이 대전부(大田府)로 승격함에 따라 대덕군 기성면(大德郡 杞城面)에 편입되고 1989년 1윌 1일 대전시가 직할시로 승격함에 따라 대전직할시에 편입 서구(西區)에 속하게 되었다. 행정동은 기성동(杞城洞)이다.
<지명>
가마바위〔바위〕
〔위치〕중미와 원원정 중간쯤 개울 북쪽 산중턱에 있다.
〔유래〕가마처럼 생긴 바위라 하여 그리 부른다.
감투봉(감투산)〔산〕
〔위치〕원원정 뒷산으로 해발 157m이다.
〔유래〕산 모양이 감투와 비슷하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구마니(구비안, 구미안, 구만리(九萬里))〔마을〕
〔위치〕덕골 윗동네로 두계천 물굽이 안쪽에 있는 8가구의 작은 마을이다.
〔유래〕물굽이가 많은 내의 건너 마을이라 하여 그리 부른다.
〔풀이〕구비안, 구미안, 구만리가 와전되어 구마니라고 부르게 되었다.
구마니보(구만리보(九萬里洑))〔보〕
〔위치〕구마니 앞내를 막아서 농사짓는 보의 이름이다.
구억말(구억촌(九億村))마을〕
〔위치〕세편이의 뒷마을이다.
〔유래〕구석진 곳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그리 부른다.
〔풀이〕구석말>구 말>구억말로 변한 듯하고, 지금은 겨우 3가구가 살고 있는 바, 세편이로 병합되었다.
기성초등학교 원정분교(杞城初等學校 元亭分校)〔학교〕
〔위치〕원정역 서쪽에 있는 학교(원정 443번지)이다.
〔특이사항〕1954년 4월 6일에 개교한 원정국민학교에서 1989년 3월 1일에 현분교로 전락되었다.
놋적골〔골〕
〔위치〕원원정 뒷골짜기이다.
〔유래〕놋쇠를 구운 곳이라 해서 생긴 이름이다.
덕골(덕곡(德谷))〔마을〕
〔위치〕원정역에서 내를 건너 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유래〕적덕을 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서 유래한다.
덕골보(덕곡보(德谷洑))〔보〕
〔위치〕덕골 앞내 원정천을 막아 농사짓는 보의 명칭이다.
두리봉(두류봉)〔산〕
〔위치〕서구 원정동과 우명동 경계에 있는 산으로 해발 272m이다.
〔유래〕동춘당 송준길의 묘소와 재각이 있다. 옛부터 산세가 두리두리하기 때문에 두리산이라고 부른다고 하나, 두류봉이라고도 한다.
뒷골(나무골, 후곡(後谷), 하발(下鉢))〔마을〕
〔위치〕원정분교 뒷마을이다.
명마고개〔고개〕
〔위치〕원정동 중미마을에서 논산군 두마면쪽으로 넘어가는 작은 고개이다.
〔유래〕임진왜란때 이여송이 조선에 인물이 너무 많이 나는 것을 우려해 이 고갯날을 끊었는데, 그때 이곳에서 명마가 나와 죽어서 고개 부근에 묻어 주었고 그곳을 지금도 말무덤이라고 부르고 있다. 한편 명마고개 부근을 왜정때 호남선 철도를 부설하기 위하여 또 한 차례 산 주룡을 잘랐는데, 이때에 자른 곳에서 피가 흘렀으며, 근래 복선화 공사를 하기 위해 바위를 더 깨내기 전까지도 혈흔이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볼 수 없게 되었다. 본디 이 마을은 790여호의 대촌이었던 것이 왜정 때 산맥을 자른 뒤부터 점점 세력이 약해져 지금과 같은 10여호에 불과한 소촌으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한다.
무도리(수도리(水圖里))〔마을〕
〔위치〕중뫼 윗마을로 현재 19가구가 살고 있다.
〔유래〕두계천이 이 마을을 휘돌아서 원정앞으로 흐르게 됨으로 그리 부른다.
〔풀이〕물돌리>물도리>무도리로 변화하였다.
무도리보(수도리보(水圖里洑))〔보〕
〔위치〕무도리 앞내에 있는 보를 말한다.
바리고개(발고개, 절골, 발현(鉢峴), 상발(上鉢))〔마을〕
〔위치〕원정역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유래〕고개 모양이 발우처럼 생겼다고 하여 그리 부르는데, 제일 높은 고개로 친다.
〔풀이〕발우고개>바르고개>바리고개로 불리게 되었고 음절을 축약하여 발고개라고도 부른다.
바리고개느티나무〔나무〕
〔위치〕1982년 11월 1일 서구 원정 373번지에 마을나무(6-3-10-6)로 지정된 보호수 느티나무이다.
〔특이사항〕본래는 둘레가 6.0m, 수고가 25m의 188년 이상된 노거목으로 송승기씨가 관리하였다. 근래엔 태풍으로 인하여 흉하게 파손되었다. 동춘당 묘소 이장시에 기념 식수한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
백토골〔골〕
〔위치〕상발 맞은편 가까운 곳에 있는 작은 골짜기이다.
〔유래〕곁으로 보기에는 천연의 산골짝 같지만 실제는 이곳에서 옛날 사기를 굽느라 흙을 많이 파내 골짝처럼 움푹한 모습이 됐다고 한다. 이곳 흙은 희유스름한 빛을 띠고 있어 보통 흙과는 특이하게 다르다 하며, 마을 뒷쪽에서 사기를 굽던 흔적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
부처바위〔바위〕
〔위치〕가마바위 못미처 마을 뒤에 병풍처럼 넙적하게 서 있는 바위이다.
〔유래〕부처처럼 생겼대서 붙여진 이름이며, 전에는 이 바위가 치성 장소로 자주 이용되었다고 한다.
삼년바위(아루배)〔바위〕
〔위치〕원정동 무도리 마을에서 물 건너 왕대리쪽 큰 앞산 발치께로 개울에 닿아 있는 큰 바위이다.
〔유래〕이 바위의 본디 이름은 <아루배>였던 것이 근래 이 바위밑에서 여름에 헤엄치며 놀던 젊은이들이 3년마다 꼭 한명씩 익사하는 사고가 발생했던 데에서 옛 이름보다도 지금은 새로운 이름인 삼년바위로 더 익히 부르고 있다 한다.
서당골(서당곡(書堂谷))〔골〕
〔위치〕황새바위 밑에 1가구가 살고 있으나, 지금은 용촌으로 편입된 골짜기이다.
〔유래〕옛날에 서당이 있었던 골짜기 이름이다.
세편이(금청리(金靑里))〔마을〕
〔위치〕덕골의 뒷마을이다.
〔유래〕고려때 금정이 있었던 마을이다.
〔풀이〕쇠편리>세편이>세펴니로 변한 뜻하나 아직도 쇠퍼니라 고집하는 사람도 있다.
세편이보(금청보(金靑洑))〔보〕
〔위치〕세편이 앞내를 막아서 농사짓는 보의 명칭이다.
세파정들(원원정야(元元亭野))〔들〕
〔위치〕세파정 봇물로 농사짓는 넓은 들이다.
〔유래〕원원정에 옛날 세파정이란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세파정보(원원정보(元元亭洑))〔보〕
〔위치〕원원정들(세파정들)에 물을 대려고 막은 보를 말한다.
원원정(元元亭)〔마을〕
〔위치〕본래의 원정리로 40여 가구가 살고 있는 마을이다.
〔특기사항〕마을 앞에 느티나무(수령 약 80년)한 그루가 있어 노인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마을 위엔 못샘이 하나 있다.
원정느티나무(원정괴옥(元亭槐木))〔나무〕
〔위치〕기성 원정동 506번지에 있는 마을나무(6-3-10-7)로 1982년에 지정된 느티나무이다.
〔특이사항〕수령은 108년, 수고는 19m, 나무둘레는 3.0m, 수관직경은 15m이다. 수세가 양호한 노거목(老巨木)으로 현재 원정동 506번지의 김영환씨가 관리 보호하고 있다.
원정교(元亭橋)〔다리〕
〔위치〕원정역에서 덕골로 들어가는 철근콘크리트 다리이다.
〔특이사항〕1988년에 재준공되었고, 길이는 약 80m 정도이다.
원정역(元亭驛)〔역〕
〔위치〕대전 기점 22.726㎞에 있는 호남선 역으로 무배치 간이역이 되었다.
위왕산(衛王山)(우렁산)〔산〕
〔위치〕서구 원정동과 유성구 방동 경계에 있는 산을 위왕산이라고 부른다.
〔유래〕위왕산은 신도안의 수구막이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는 산으로 신도안에 자리하고 있는 임금을 호위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위왕산(衛王山)혹은 위왕산(爲王山)으로 부른다고 한다. 신도안부근의 모든 산들이 신도안을 향해 굽히고 있는 모습인데 비해 이 산만은 신도안을 등지고 있는데 그것은 수구막이를 호위하는 대장이 말을 탄 자세로 외곽을 경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로 그런 이치로 하여 이 산이 있음으로서 신도안은 도읍터의 의미를 지닐 수 있게 되는 것이라 한다. 또한 원정동에서는 우렁산, 중뫼(中山)라고도 부르고, 위왕산(違王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모든 산이 계룡산을 향했는데 유독 위왕산만은 정반대 방향으로 토라져서 기묘한 바위산의 형체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위왕산다리〔다리〕
〔위치〕중뫼에서 두계로 이어지는 철근콘크리트 다리이다.
〔특이사항〕1975년경에 준공되었고, 길이는 약 67m 정도이다.
위왕산 철교(衛王山鐵橋)〔다리〕
〔위치〕가수원 3철교;대전 기점 22.186㎞에서 22.304㎞까지 118m의 철교를 지칭하며, 위왕산 앞에 있고, 밑에는 두계천이 흐르고 있다.
〔특이사항〕1911년 9월 12일 호남선 개통 직전에 놓인 철교이다.
절골〔골〕
〔위치〕원정동 상발마을 남서쪽 산골짜기이다.
〔유래〕옛날 절이 있었던 데에서 붙여진 이름인데 빈대가 끓어서 망했다 하며, 지금도 절터 기왓조각을 파보면 빈대가 나온다 한다.
중뫼(중산(中山))〔마을〕
〔위치〕위왕산(衛王山)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풀이〕중뫼>중미로 변하였고, 한역하여 중산이라 부르는 경우는 드물다.
중뫼보(중산보(中山洑))〔보〕
〔위치〕중뫼 앞내에 있는 보를 말한다.
책바위〔바위〕
〔위치〕세편이 입구에 있는 바위이다.
〔유래〕책을 많이 쌓아 놓은 형체를 이루고 있으며, 서당골 건너에 있어서 이채롭다.
한다리들보〔보〕
〔위치〕한다리들로 급수하는 보의 지칭이다.
황새바위〔바위〕
〔위치〕뒷골 입구에 있는 바위이다.
〔유래〕이 바위가 있음으로 해서 위왕산, 속칭 우렁산이 꼼짝 못한다고 한다.
<역사인물>
김용원 묘(金庸源 墓)
독립운동가 김용원(1892(고종29>∼1934)의 묘가 덕골에 있다. 본관은 경주(慶州), 경여(慶餘)의 8대손으로 자는 중옥(仲玉), 호는 강산(剛山)이다. 1914년 휘문의숙(徵文義塾)을 졸업하고, 3·1운동 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경무원이 되었다. 독립운동 자금과 외교후원회 자금의 조달을 위해 귀국, 의친왕(義親王) 이강(孝堈)과 접선하여 대동단(大同團)을 조직하고, 의친왕을 상해로 망명시킬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 뒤에 다시 상해로 망명했다가 1924년 독립공채(獨立公債)를 소지하고 귀국하다 피체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중 이듬해에 형집행이 정지되어 출옥하자 다시 상해로 망명하였다. 1926년 논산에서 일경을 타살하고 피신 중 1927년 안동에서 피체되어 무기형을 받고, 그 후 1934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병보석되었으나 이듬해 병사했다. 묘역 입구에 대전시장이 건립한 기념비가 있다.
동춘당 묘(同春堂 墓)
바리고개에는 조선중기의 거유 동춘당 송준길(宋浚吉;1606(선조 39>∼1672(현종 13>)의 묘가 있다. 송준길(宋浚吉)의 본관은 은진(恩津), 이창(爾昌)의 아들로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었고, 그는 성리학자로서 예학에 밝았고, 율곡의 학설을 지지한 그는 문장과 서예에도 능했고, 문묘를 비롯하여 여러 서원에서 제향하고 있다.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후손들이 연기군 죽안리(燕岐郡 竹岸里)에 초장하였다가 3년 후 대전시 가양동 흥룡으로 이전하였다. 그 후 24년이 지난 1700년에 현위치로 이장하여 오늘에 이른다. 묘비문은 외손인 판서 민진후가 글을 짓고 증손인 요좌가 글씨를 썼다. 1989년 3월 18일 대전직할시 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풍수지리상 중이 장삼을 입고 춤을 추는 형국이라고 하며, 이에 호응하여 마을 주위에 <주지봉(住持峰)>이 있고 <발우고개>가 있어 더욱 좋은 형국을 이루고 있다 한다.
송광식 묘(宋光棋 墓)
동촌당의 묘소 아래에 송광식(宋光 )의 묘소가 있다. 송광식(1625∼1664)은 동춘당 송준길(宋浚吉)의 아들이다. 김집(金集), 송시열(宋時烈)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사마시에 합격하여 공조정랑(工曹正郎)을 지냈으며, 이조참판의 증직을 받았다.
완산이씨열녀정문(完山李氏烈女旌門)
원정분교 옆에 있는 정문이다. 이는 송병조(宋炳朝)의 부인 완산 이씨의 열녀문이다. 그녀는 동춘당의 손부인데, 남편이 작고하자 삼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처음에는 전북 완주군 삼례에 있는 이씨 묘소 앞에 세웠던 것을 회덕 송촌으로 이전했다가 자손들이 이거함에 따라 이곳으로 다시 옮겨 세웠다 한다.
4. 봉곡동(鳳谷洞)
〔위치〕서구의 남단 구봉산(九峰山)밑에 위치한 법정동이다. 동쪽은 흑석동, 서쪽 유성구, 남쪽은 원정동과 용촌동, 북쪽은 관저동과 경계하고 있다.
〔연혁〕봉곡동은 백제(百濟) 때 진현현(眞峴縣)에 속했으며 신라(新羅) 때는 진령현(鎭嶺縣)에 속했었다. 고려(高麗) 때는 기성부(杞城府)에 속했으며 뒤에 공주부에 속했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진잠현(鎭岑縣)에 속했었다. 조선시대 말기 고종(高宗) 32년(1896)에는 진잠군(鎭岑郡)에 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대전군 기성면(大田郡 杞城面)에 속했으며 1935년11월 1일 대전읍이 대전부로 승격함에 따라 대덕군에 속했다가 1989년 1월 1일 대전시가 직할시로 승격함에 따라 대전직할시에 편입 서구(西區)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행정동은 기성동(杞城洞)이다.
<지명>
가마바위〔바위〕
〔위치〕봉곡동 안쇠실 뒷산 정상에 있는 사각형의 큰 바위이다.
〔유래〕바위가 얹혀 있어 가마처럼 생겼다 하여 가마바위라 한다.
가마방골〔마을〕
〔위치〕안쇠점(內金谷)의 서쪽 막바지에 있는 마을이다.
가마방골(가마바위골)〔골〕
〔위치〕안쇠실 윗쪽 골짜기이다.
〔유래〕골짝 맨 위 산에 가마바위가 있어 ‘가마바위골’이라 부르던 것이 뒤에 가마방골로 불리게 되었다 한다.
구봉산(九鳳山)〔산〕
〔위치〕관저동과 가수원동의 남쪽과 봉곡동과 흑석동, 괴곡동의 북쪽에 있는 명산이다.
〔유래〕이 산에 높은 봉우리가 9개나 수려하게 솟아 있다고 해서 생긴 이름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구봉산(九鳳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구봉산은 해발 264m이며, 신선이 내려와 바둑을 두었다는 전설도 있다.
이 산의 남쪽에는 갑천이 휘돌아 흐르고 있으며, 바위 벼랑을 이루어 가파르기는 하나 1993년에 건립한 구봉정(九鳳亭) 전망대에서 보면 서구 관내가 한 눈에 조망되어 참으로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촌노들의 말을 빌리면, 구공산(九功山)이어서 훌륭한 인물이 끊기지 않고 근처에서 계속 나와서 공신(功臣)이 된다고 전하기도 한다.
금곡보(錦谷洑)〔보〕
〔위치〕금곡천을 막아서 쇠점들에 농업 용수를 공급하던 보의 이름이다.
금곡천(錦谷川)〔내〕
〔위치〕금수봉(錦繡峰)에서 발원하여 갑천(甲川)과 합류하는 냇물 이름이다.
〔유래〕옛날 고려 시대엔 금곡천 모래를 쳐서 금광석을 채취하였다고 전한다.
금바위〔바위〕
〔위치〕봉곡동 바깥쇠실 마을 어귀를 감싸듯 가로막고 있는 산발치에 있다.
날라리골〔골〕
〔위치〕안쇠실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유래〕날라리를 불며 다니던 곳이라 하여 이렇게 불렀다 한다.
대고개(댓고개, 맑고개, 대현(大峴))〔고개〕
〔위치〕벌곡(伐谷)과 내외금곡(內外金谷) 등지에서 진잠초등학교로 넘어가던 구봉산의 큰 고개를 지칭한다.
말바위〔바위〕
〔위치〕병풍바위 동쪽 맞은 편 산등성이에 십오미터 정도의 긴 바위가 땅에서 약간 돌출된 상태로 길게 깔려 있는 바위이다.
〔유래〕멀리서 보면 말이 앉아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바깥쇠점(아랫말, 외금곡(外金谷))〔마을〕
〔위치〕안쇠점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특이사항〕현재도 50 가구가 거주하는 큰 마을이다. 뒷산에는 구봉산신에게 제사 지내는 산제당이 있다. 이 산제당은 구한말부터 덕수 이씨네가 당우를 짓고 제사 지내고 있다.
병풍바위〔바위〕
〔위치〕가마바위가 있는 산 동북쪽 가까운 곳에 십여미터 높이의 넓은 바위가 둥근 모습으로 서 있는데 이를 병풍바위라고 한다.
〔유래〕바위 가까이에서 보면 깎은 듯이 반듯한 바위가 수직에 가깝게 치솟아 있는 모습이 병풍을 세워놓은 것 같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봉곡교(鳳谷橋)〔다리〕
〔위치〕봉곡동에서 흑석동으로 소통되는 교량이다.
〔특이사항〕총연장이 104m, 교폭은 7m이다. 1988년 3월 20일에 착공하여 동년 11월 25일에 완공되었다.
봉곡 느티나무(봉곡괴목(鳳谷槐木))〔나무〕
〔위치〕봉곡동 68-2번지에 있는 마을나무(6-3-10-9) 이다.
〔특이사항〕1982년에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수령은 118년, 수고는 21m, 나무둘레는 3.7m, 수관직경은 15m이다. 이 느티나무 잎이 일제히 피면 풍년이 들고, 단계적으로 나누어 피면 흉년이 든다는 전설이 있다. 현재 봉곡동 68-2 번지의 이화영씨가 소유 관리하고 있다.
불무실(야실(冶室))〔마을〕
〔위치〕유천동 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유래〕고려 시대에 불뭇간(冶匠間)이 있었으므로 생긴 마을 이름이다.
안쇠점(쇠점, 쇠골, 내금곡(內金谷), 철점(鐵店), 금곡(金谷))〔마을〕
〔위치〕봉곡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유래〕고려 시대에 금을 캐던 금점(金店)이 있었으므로 생긴 이름이다.
옻샴〔샘〕
〔위치〕바깥쇠실과 안쇠실 중간지점 서쪽 골짝에 있는 샘이다.
〔유래〕옻오른데 이 물로 씻으면 효과가 있다 하여 부르게 된 이름이라 한다.
유천동(柳川洞)〔마을〕
〔위치〕봉곡산성(鳳谷山城)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유래〕마을 앞 냇가에 버드나무가 많이 나서 자라고 있으므로 생긴 이름이다. 유천리(柳川里)라고도 부르는 지명이다.
유천동보(柳川洞洑)〔보〕
〔위치〕유천동 일부와 대추벌들에 물을 공급하던 보의 이름이다.
<토속>
봉곡동의 금바위
봉곡동 바깥쇠실 마을 어귀를 감싸듯 가로막고있는 산발치에 흔히 이 바위 때문에 마을이 좋다는 말을 옛날부터 많이들 해왔다고 한다. 한편 이 바위 앞을 지나 마을 입구로 이어지는 진입로 하천변을 옛날부터 수구맥이라고 했고, 밖에서 마을 입구가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곳에 버드나무를 많이 길러왔었는데, 근래 이 수구막이 버드나무를 임의로 베고난 뒤부터 갑자기 마을에 많은 재난이 잇따라 발생했다고 한다. 이에 주민들이 다시 버드나무를 심어 전과 같은 모습을 회복하게 되면서 마을의 재난도 점차 없어졌다 한다.
봉곡동의 장군단좌(將軍端座)명당
가마방골 서북쪽 높은 산이 장군봉으로, 이 산을 중심으로 한 주위 산들이 풍수지리상 장군단좌형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장군봉 주위에 있는 말바위도 장군단좌형을 보조해 주는 구실을 하는 것으로 볼수 있다 하는데, 그러나 장군단좌혈이 어딘지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며, 자리를 차지하기에 적합한 덕있는 인물이 나타나야만 발견될 것이라 한다.
<역사인물>
봉곡산성(鳳谷山城)
봉곡동에 위치한 봉곡산성은 흑석동 정류장 강 건너편 봉곡산에 있는 석축 산성이다. 이 곳 사람들은 당나라 소정방의 군대가 머물렀다는 전설이 있다하여 이 산성을 정방(定方)산성이라고도 하나 이는 근거없는 말이다. 또한 동네 이름이 정방(貞坊)리라 하여 정방(貞坊)산성이라고도 부른다.
이 산성은 표고 180m의 산정에 테뫼식으로 돌려진 석축산성이다. 성주위는 540m 정도이며, 성체는 붕괴되었으나 그 윤곽은 뚜렷하게 확인된다. 성밖에서 본 성벽은 산꼭대기 부위의 험준한 지형이 깍아내린 듯 벽면을 이루고 있다. 서쪽 산록에 걸쳐 축조된 석벽과 함께 2중성 같이 보이고 있다. 현재 통로로 이용되고 있는 성벽의 끊어진 부분이 남문지로 추정되며, 문폭은 2.8 m이다.
성내 동쪽과 서쪽에는 넓은 평지가 있어 당시의 건물로 짐작되는데, 동벽 내의 평지는 갈대숲이 우거졌고 서벽내 평지는 경작한 흔적이 있다. 이 곳에는 개배편(蓋杯片)을 비롯하여 선조문(線條文), 격자문(格子文), 사격자문(斜格子文) 등의 토기편과 다양한 문양의 와편이 다수 수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