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충남녹색연합 박은영 시민참여팀장
계절과 계절 사이가 있다. 봄이지만 겨울처럼 춥고, 여름이지만 가을처럼 서늘한 그런 계절의 틈. 요즘이 겨울과 봄 그 사이이다. 햇살의 따뜻함이 맴도는 대기 속으로 차가움을 머금은 바람이 겨울의 뒷모습으로 사람 사이를 스쳐간다. 그러면서 계절은 작년에도 그랬고, 제작년에도 아니 더 오래전에 그랬던 것처럼 네 번의 화려한 변주곡을 세상에 들려준다. 그 연주는 한 번도 쉰 적이 없다. 끊임없이 제자리를 찾아 돌아온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에서 어른이 되고 무엇인가를 꿈꾸게 되면서 많이 변하고 다른 자리를 찾아 여기저기 헤멘다고 하지만, 사실 아니다. 흘러가는 시간 속을 사는 사람은 ‘제자리’를 찾아 갈 뿐이다. 늘 제자리를 찾아오는 태양과 바람, 계절과 산야를 바라보면서 말이다.
두 개의 강이 만나는 곳, 합강리
▲출발하기 전
오늘 순례단은 연기군 금남면 합강리부터 남면 나성리까지 순례길에 오르게 된다. 순례단이 두 번째 걸음을 시작한 곳은 금강과 미호천, 두 개의 강이 만나는 합강리이다. 금강의 중하류라고 볼 수 있다. 합강리는 곡류하천(曲流河川)이 유로가 바뀌면서 하천 가운데 생긴 퇴적지형인 하중도가 형성되어 있고, 곡류부분에는 모래톱이 형성되어 있다.
합강리의 모래톱은 중부고속도로(음성-진천-증평-청주-청원-연기)로 주변 오염원이 형성되면서 악화된 무심천의 수질과 갑천 상류 대청호부터 대전시를 거쳐 금강으로 유입된 오염된 수질을 정화시켜 금강으로 내려보내는 역할을 하는 중요한 곳이다.
이 곳은 우수한 내륙철새도래지이기도 하다. 매년 큰기러기, 가창오리, 흰꼬리수리, 수달, 큰고니, 황오리 등이 찾아오고 있다. 최수경 생태문화해설사는 1주일 전까지만 해도 큰 기러기가 많았고, 석양이 지자 그들만의 대열을 이루어 미호천 상류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2주일 전에는 큰고니도 스무 마리나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계절이 되면 돌아오는 그들의 자리, 바로 합강리는 새들의 자리이다.
▲순례중!
순례단이 주로 강가의 갈대밭 길이나 논둑을 따라 걷는 동안 근접한 도로쪽에서는 대형트럭이 쉴 새 없이 오가고 있다. 운하가 아니어도 이곳은 이미 행정복합도시개발로 어수선하다. 연기사랑청년회 황규원 회장은 세종도시특별법 통과 이후 연기군은 붕 뜬 상태라고 한다. 땅값과 관련된 여러 근거없는 소문이 돌기도 하고 외지인들도 오고 갔을 테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소문 중에는 금강에 한강처럼 유람선을 띄운다는 이야기도 있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금강운하건설을 예전 연기군 북면에서 청원군 부강을 거쳐 한양(서울)으로 왔다갔다 했듯 작은 배가 물건 실고 오간다고 생각하지, 커다란 배가 지나가기 위해 지형을 넓히고 강바닥을 파내는 등 주민 생존에 영향을 줄 만큼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한다. 유람선이 아니라 거대한 화물선이 움직일 수 있는 운하가 만들어지면 우리가 지금 걸으며 보고 있는 모래톱은 없어질 수 밖에 없고, 모래사구가 하던 정화작용이 없어진다면 금강은 점점 오염되어 갈 것이다. 철새들은 더 이상 금강을 찾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화려한 군무도 볼 수 없을 것이다. 황규원 회장은 90년대 초반에만 해도 여름이면 숭어가 튀어올라올 정도로 맑았던 금강을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앞으로 주민들과 함께 운하를 막기 위해 힘을 모아보겠다고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
▲금강운하건설반대!
제자리에 두어라
순례단은 두 번째 걸음을 마무리 하면서 작은 퍼포먼스를 준비했다. 금남대교 아래 강가로 들어서서 ‘금강운하백지화’라는 커다란 피켓을 들었다. 저 글씨가 얼마나 커야, 우리의 외침이 얼마나 커야 세상이 다 보고 들을 수 있을까? 그 말을 보아도 못 본 척하는 사람들이, 들어도 못 들은 척 하는 사람들이 외치는 이의 마음, 그 절실함을 이해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언제나 강의 말을 듣기 위해 자기를 비울만한 여유를 갖게 될까? 장화를 신고 강물로 들어간다. 한 발 한 발 옮길 때마다 강물의 차가움이 장화를 신었어도 느껴진다. 강물로 들어가는 이들을 지켜보는 순례단들은 말이 없다.
침묵의 흐름 사이로, 발에 느껴지는 금강의 흐름 사이로 우리는 금강의 말을 듣는다. 우리는 자연의 말을 듣는 방법을 잘 모른다. 하지만 그 방법이란 너무나 쉽다. 입을 닫고, 머릿 속 생각을 한 구석에 잘 개어두고, 공작새가 천천히 날개를 펼치는 것처럼 마음을 열면 들린다. 하지만 우리는 듣기 위해 우리를 비우기 보다 우리를 채우기 위해 듣는데 익숙하기 때문에 자연의 말을 듣는 방법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잘 사는 방법’이라고 판단하며 살아간다. 침묵이 흐르는 공기를 통해 우리 마음에 금강의 말이 들린다.
“바라건데 모든 것을 제자리에서 살아가게 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