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충남녹색연합 공동탐사>
벌목, 채석…. 석지골고개 곳곳 상처
8. 금북정맥 차령고개-금자봉
<글:이 용 대전일보 기자, 도움:정기영 간사>
▲지방도 629호선의 곡두터널. 금북정맥의 곡두재를 통과한다.▲
금북정맥의 세 번째 탐사 구간은 차령고개 봉수산-청양 금자봉이다. 차령고개 봉수산-석지골고개-개치고개-곡두재-갈재고개-각흘고개-봉수산-천방산-극정봉-차동고개-장학산·관불산-야광고개-국사봉-금자봉에 이른다.
금북정맥이 공주 정안면과 천안 광덕·송덕면의 경계를 따라 서쪽으로 뻗어가다가 아산 송악면, 예산 대술면, 공주 유구읍의 삼각점에 우똑 솟은 봉수산(535m)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예산과 공주의 경계를 따라 청양에 다다르는 구간이다.
탐사는 봉수산(366m)에서 다시 시작됐다. 봉수산과 석지골고개 사이는 인제원고개인데 그 고개 아래로는 천안-논산간 고속도로 차령터널이 뚫려 있다. 터널의 길이가 무려 2400m로 금북정맥을 관통하고 있다. 터널 을 사이에 두고 태봉산(469m)과 무학산(396)이 터널로 생긴 상처의 아픔을 달래며 마주보고 있다.
석지골고개에서 천안 광덕면쪽으로는 벌목과 채석으로 정맥의 곳곳에 상채기가 드러나 있다. 천안 광덕면629번 지방도의 지산리 입구에는 마치 폭탄을 맞은 것처럼 수 십그루의 나무들이 잘려 나가 있었다.
석지골고개 아래의 지장리마을에는 건설업체의 석산개발 현장이 두 개나 있다. 채석이 중단된 한 채석장 옆에는 ‘이 지역은 화약 폭발지역으로서 아주 위험하므로 외부인 및 차량 출입을 통제하오니 적극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푯말이 위협하듯 서 있다.
그 푯말 뒷편의 벌목으로 벌거숭이가 된 야산에서 마을 아주머니들이 한가로이 봄나물을 캐고 있다.
정맥은 석지골고개에서 개치고개를 지나 곡두재로 이어진다. 곡두재에는 천안 광덕면 광덕리와 공주 정안면 산성리를 잇는 지방도 629호선의 곡두터널(665m)이 뚫려 있다.
바로 옆의 갈재고개는 광덕리와 공주 유구읍 문금리를 잇는 비포장도로가 나 있다.
갈재고개 북쪽으로는 ‘나라에 전란이 일어나거나 불길한 일이 있으면 산이 운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천안의 명산 광덕산(699m)과 마곡사의 말사인 광덕사가 자리하고 있다.
봄바람이 시원한 휴일의 광덕산에는 봄나물을 캐거나 절을 찾는 이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정맥은 각흘고개를 따라 봉수산(535m)에 다다른 뒤 방향을 틀어 남진한다. 봉황새를 닮았다는 봉수산은 예산, 아산, 공주 등 3개 군에 걸쳐 있는 산으로 봄이면 온통 진달래로 꽃밭을 이룬다.
지산리 입구 수십그로 나무 잘려 나가
봉수산에서 남쪽으로 뻗은 정맥은 예산과 공주의 경계를 따라 천방산(479m), 극정봉(424m)으로 이어진다. 동쪽으로는 39번 국도를 사이에 두고 금학산(574m), 법화산(470m)이 서로 키재기를 하듯 솟아 있다. 이 곳 역시 곳곳에서 벌목이 이뤄지고 있다.
극정봉의 아랫마을인 유구읍 명곡리에는 수령이 수 십년은 되보이는 나무들이 널부러진 채 쌓여 있다. 가까운 곳의 산은 마치 산불이 휩쓸고 지난 간 것처럼 민둥산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극정봉을 지나면 차령고개다. 주민들이 차동고개라고 부르는 이 고개는 예산 신양면과 공주 유구읍을 잇는 국도 32호선이 지난다. 차동고개의 오르막이 시작되는 곳에는 대규모 석산개발이 이뤄지고 있다. 이 곳은 골재를 운반하는 차량이 쉽게 오르 내리게 하기 위해 포장도로까지 개설돼 있다.
석산개발 현장에서 수 백m 떨어진 곳에선 고속도로 공사를 위해 산이 절개돼 있다.
차령고개부터 장학산(381m)과 관불산(399m), 야광고개, 국사봉(489m), 금자봉(325m)에 이르는 구간은 활석 광산과 석산개발 공사장들이 유독 많다. 이 일대에만 3-4곳이나 된다.
관불산과 국사봉에는 활석 광산이 있다. 지금은 활석 채취가 중단돼 지하 수 백m까지 뚫고 들어간 광산이 그대로 방치돼 있다. 현지에서 만난 주민 윤석승씨(48)는 “이들 광산에선 몇 해전까지 채굴이 이뤄졌다”며 “관불산의 활석 매장량은 엄청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
관불산에선 몇 해전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박아 놓은 쇠말뚝이 발견돼 뽑아 내기도 했다. 금북정맥의 기맥을 단절시키기 위해 일본인들이 쇠말뚝을 박았던 자리 아래로 이제는 수 백m의 광산이 뚫려 있다고 생각하니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