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촌동(曾村洞)
시루봉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서 시루(증)라는 뜻의 증촌동이었으나 더할 曾자 증촌동이 되었다. 무송유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고려건국을 도운 유금필장군이 무송유씨의 시조이다.
이곳에 유씨들이 살게 된것은 임진란때 유웅이 피난처를 찾아 이곳에 이사와서 마을을 이루고 살기 시작하기 부터이다.
왕바위(여의주바위)
마을 뒷산 아래에 둥그런 모양의 커다란 바위돌이 묵직하게 자리잡고 있다. 왕바위라고도 하고 여의주모양을 닯았다고 해서 여의주바위라고도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신령스럽게 믿고 있고 마을을 지켜주는 지킴이로 여긴다.
바위 아래에는 마을사람들이 세운 비문도 있는데
마을이 생긴 유래와 한마음정신병원 회장인 유종상선생이 쓴
“…마을사람들이 신령스럽게 여기는 마을 지킴이이다. 이 고장에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 큰 뜻을 이룰 것을 바라고 있다….”
글이 새겨 있다.
왕바위아래 샘물
72년도에 조0 0 군수가 와서 물맛을 보고는 “물맛이 아주 좋다”고 하며 시멘트 50포를 하사해서 마을 공동 샘을 만들었다.
지금은 마을에 수도가 들어와서 이용하고 있지 않다.
예전엔 빨래도 하고 물도 길어다 먹느라 북적거렸을 공동샘
이 곳에 와서 마을 소식이랑 바깥 소식에 귀 기울였을 동네 사람들이 눈에 선하다. 샘은 지금도 솟고 있지만 관리가 안돼 벌레가 날아다니고 더러워져 있다.
샘 바닥의 돌들이 빨갛게 되어 있는데 철분이 많아서 일까?
갑천과의 관계
이 마을은 갑천과 떨어져 있어서 홍수 피해를 입지 않고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어릴 때에는 갑천에 나가 물고기도 잡고, 도슬비(다슬기, 올갱이)를 잡아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먹고 물놀이도 하였다. 지금은 오염이 심해 못한다
그런데 뒷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홍수때면 넘쳐서 도랑을 복개하고 마을길을 넓혔다.
유헌봉(71세)할아버지
19대조부터 마을에 안착. 무송유씨 35대손
기성동 노인 연합회 총무
대대로 살아온 마을을 지키고 사는 것이 당당하신분
버스 정류장에서 청소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진두지휘하고 계셨음. 아드님이 은하수아파트 관리소장이라고 자랑하신다.
어르신들
우리가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쓰레기를 치우고 계시는(오늘은 기성동 관내 쓰레기 청소하는 날이라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보였다.
“뭐하는 사람들여?” 글씨?..
라고 수군대며 쳐다보시다가, 우리가 가까이 가자
관심 없는듯 각자 일에 열심인척 하셨지만,
아름다운 미모의 우리 해설사아줌마들이 낭랑한 목소리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자
금세 일손을 놓고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신다.
새참으로 드시는 떡을 떼어서 우리에게 건네고 소주까지 한잔 권하신다. 사양한 소주 한잔이 좀 아쉽다 ㄲㄲㄲ
70 – 80세의 어르신들이 정정하게 생활하고 계신다
유동식 할아버지(87세)
지경다지기 놀이에서 지경소리를 매긴다. 가히 절창이라는 평.
마을제사
일년에 한번 정월 보름에 왕바위에 모여서 제를 지낸다
동네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한 후에
떡과 과일 고기 등의 제수를 준비해서 낮 12시에 동네 어른이 주관하여 마을제를 지낸다.
세대수
40여 세대가 살고 있음.
자손들이 잘 되어서 잘 살고 있음이 보람있다고함.
집성촌이라서 마을의 결속이 잘 되고 마을 앞까지 버스가 들어오고 마을길이 넓어서 교통이 편리함
영보재
무송유씨의 사당인 영보재가 마을의 제일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